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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라뇨.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릴 수 있는데”

관리자
2019-01-16
조회수 1507


 

우연히 한 잡지에서 그녀의 그림을 보게 됐다. 화려한 색채에 조금은 과장된 듯 보이는 얼굴들. 방금이라도 화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포스까지. 자세히 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초상화다. 단지 셀럽의 그림이라 눈에 띈 것만은 아니다. 턱을 치켜세우며 지긋이 내리꽂는 ‘퍼렐 윌리엄스’의 눈매는 상당히 거만해 보였고, 화려한 꽃 모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가인’과 짙은 선글라스에 팝콘 박스를 들고 있는 ‘씨엘’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특히나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이 작품을 그린 재료가 독특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소개 글에 ‘화장품 그림 작가’라고 적혀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 소재가 물감이 아니라고? 안방에 굴러다니는 버려진 화장품으로 그렸다니. 작가는 이미 화장품 그림으로 소셜 미디어를 비롯해 온라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미승(24)씨다.

“화장을 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공감하겠죠? 북적북적한 화장대 위에 사용하는 화장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에게나 쓰지 않는 화장품이 몇 개씩은 있을 거예요. 굳은 마스카라, 눈가에 번지기 쉬워 손이 안 가는 아이라이너, 취향에 맞지 않는 색상의 립스틱, 유통기한이 지난 파운데이션 등은 다 사용하지도 않은 채 버려지거나 화장대 자리만 차지합니다.” 작가가 밝힌 화장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소탈했다. 버려진 물건들이 눈앞에 걸리적거려서라 했다.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SNS에서 그녀의 그림에 ‘좋아요’와 댓글로 환호하고 있는데, 단지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그녀가 온라인에서 그림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신청자가 무려 650명이나 몰렸을 정도로 스타 작가로 통한다. 심지어 기업으로부터 협업을 세 번이나 제안 받았을 정도로.
평범한 미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의 꿈을 키웠다. 2014년 아동미술학과에 진학하면서 그녀는 대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 실망했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꿈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미술보다는 교구재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는 수업에 더 이상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대학 진학 이후에 혼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 예전 엄마의 화장품으로 몰래 화장을 하던 사춘기 소녀는 온라인에서 수천 명이 환호하는 새로운 영역의 작가로 성장했다.

그녀가 화장품 그림에 도전한 또 다른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이런 화장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환경오염을 생각하게 됐어요. 고민 끝에 제 전공인 미술을 접목해 화장품을 이용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화장품 본래의 미적 역할을 살리면서 화장품을 새롭게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해요. 이제는 ‘리사이클링 아트(Recycling Art)’로 당당히 불리고 싶습니다.” 버려진 물건을 소재로 한 문화예술 사례는 다른 것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남미 파라과이의 쓰레기 매립지에 위치한 빈민촌 카테우라. 아이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고물을 찾아 악기를 만든다. 깡통은 바이올린으로, 드럼통은 첼로가 되어 연주한다. 빈민가의 아이들은 “세상은 우리에게 쓰레기를 줬지만, 우리는 세상에 음악을 들려줍니다.”라고 말하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2015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랜드필 하모닉>의 줄거리다. 카테우라 빈민촌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이야기처럼 그녀도 화장품 그림이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개척자가 됐다.

“화장품으로 사람을 그리는 첫 과정은 파운데이션으로 메이크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결을 표현하고, 쉐이딩(Shading)하는 것처럼 음영을 주어 윤곽을 잡은 뒤 마스카라로 머릿결을 표현하거나 아이섀도로 입술 색을 표현해요. 제품 용도에 제한 없이 화장품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편입니다. 표현이 불가능할 것 같던 부분의 표현이 가능해지고 나만의 노하우를 찾아갈 때, 재미와 희열을 동시에 느꼈어요. 어떤 때는 미술 도구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어떤 때는 메이크업 도구로 종이에 화장을 합니다. 그렇게 화장품으로 그린 그림의 질감은 각도와 빛에 따라 다른 매력을 보여줘요. 화장품의 종류가 워낙 많다 보니 ‘어떤 제품을 써볼까?’하는 고민마저 즐겁습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라는 여자들 사이에서 명언처럼 말이에요.”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완성되기 까지 시간은 대략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짧지 않은 작업 시간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이 상품화되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화장품 회사로부터 제안 받은 기회가 실현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탁받은 초상화에 그녀는 당사자와의 특별한 교감 없이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는 이유로 선뜩 승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 그녀는 화장품 그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스타 작가로 통하지만 그녀의 수입이 0원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전업 작가로서 수입이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은 밝아보였다. “조금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제가 즐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행복해요. 꿈은 노력하면 누구나 이룰 수 있잖아요. 다만 어려운 순간에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 아닐까요? 액자 구입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시간들도 제 꿈을 위해 다가서는 순간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까지 잘 버텨왔어요. 아마 앞으로도 잘 버틸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진로에 관해 고민이 많은 학생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학교에서 저처럼 똑같은 고민을 하는 후배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길이 취업을 위한 길이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후회는 없다는 거예요.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해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지금 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라고 말했다. 덧붙여 “10년 후의 제 모습은 화장품 그림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작가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