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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갤러리] 황창배의 작품, 자료를 보여주는 복합문화공간

관리자
2019-01-16
조회수 1908

황창배 화백이 떠난지 꼭 16년이 된 지난 2017년에 발족된 황창배 기념 사업회(운영위원 강경구, 금보성, 김복기, 김상철, 김선 두, 김호득, 오숙환, 이승철, 이종목, 정종미, 홍순주 외 다수)와 유가족(부인 이재온, 자녀 용모, 은아)이 건립한 ‘스페이스 창배’ 는 "황창배를 기억하는 장소이자 예술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의 사랑방"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든 장소이다. 기념사업회는 "스페이스 창배를 통해 황창배의 유작을 감상하며 그를 기억하고 현대 한국화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스페이스창배 전경
스페이스창배 전경


 

연희동의 새로운 복합문화공간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한 스페이스 창배는 동양화가 고(故) 황창배(1947-2001) 작가를 추모하는 공간이자 그의 빼어난 작품을 상설, 기획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20세기 후반, 한국화의 지형도를 완전히 변화시킨 황창배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이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창배’는 황창배의 유작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들의 작품 및 황창배의 영향을 받은 동료, 후배작가들의 작품들 을 다채로운 기획전시의 형식으로 꾸며내고 있다. 따라서 한국근현대기의 동양화, 서예, 전각 등의 여러 작품들을 살필 수 있는 공간이자 해당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자료실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페이스 창배는 황창배 기념사업회를 주축으로 전시, 학술행사, 아카데미, 작가 발굴, 공연 등 연희동의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나가는 곳인데 문화공간의 역할과 동시에 트렌디한 디저트 카페와 유러피안 레스토랑도 함께 입점되어 있다.

특히, 마스터 쉐프코리아(올리브)와 냉장고를 부탁해(JTBC) 의 스타쉐프 박준우가 운영하는 오트뤼 디저트 까페(1층)와 알테르에고 유러피안레스토랑(2층) 이 런칭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단지 전시장만 위치해있는게 아니라 카페, 식당 등과 함께 맞 물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장소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과거 정·재계 고위관리직 인사와 유명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연희동은 홍대일대와 연남동의 확장으로 점차 젊은 감각의 트렌디한 거리와 동네로 탈바꿈되고 있는 형편에 이 근처에 이러한 다양한 문화복합공간이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흐름에 발 빠르게 반응한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창배는 2017년 4월 11일 개관기념전을 시작으로 활발한 전시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향후 달라진 전시공간, 복합문화공간의 모델로서 의미있는 공간이 바로 창배스페이스라고 생각한다. 

 

황창배 화백의 삶 

황창배 화백은 파격적인 작풍으로 '한국화의 이단아' 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1947년 서울 출생으로 경복중고교와 서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ROTC 8기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이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에게 동양화를,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1921~1993) 선생에게 글씨를 각각 배우며 기초를 닦은 뒤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작가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후 명지전문대, 경희대, 동덕 여대,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이후 전업작가로 활동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작가다.

황창배는 80년대까지 동양화에서 강제하고 있던 금기나 구분, 경계를 가능한 지워나가고자 한 이다. 먹과 채색을 두루 혼합하고 중심적인 화면구성에서 벗어난 전면적인 회화이지 구상과 추상, 번짐과 여백, 선과 면, 색채와 질감처리, 그림과 문자 등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면서 동양화의 확장된 방법론을 실현해나갔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창성과 혼으로 넘치고 있는 민화에서 영감을 차용해 한국인의 일종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낸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황창배는 민화 양식이야말로 참다운 민족적 양식의 그림이라고 보았다. 이미 1970년대에 김기창의 바보산수, 그리고 장욱진, 이왈종, 박생광 등이 민화를 끌어들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현하던 때였다.

조선시대 민화의 건강한 생명력과 조선 초상화의 비상한 정신주의, 고려불화의 진채수법이나 몰골선과 백묘준이 통합된 형상, 문자의 기입과 단기연호의 사용 등으로 그의 혼재된 그의 화면은 수묵화와 채색화에서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측면을 모두 흡수해낸 그림이 되었다. 그림과 글자(문자), 구상과 추상, 평면과 입체, 먹과 채색 등을 혼재된 종합적인 화면이었다.

그것은 기존 동양화와는 무척 다른 방법론이자 실험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그림의 근간은 동양화가 지향하는‘서화동원’과 한국의 전통 민화의 세계, 설화와 신화의 세계 등을 차용하고 응용한 작업이다. 동시에 그의 그림은 회화의 자율성으로 충만하다.

그림 안에 ‘즉흥적 생명력과 무목적적 자유방임의 순수성’ 을 불어넣고자 한 그는 기존 동양화가 보여주는 표현의 인습성과 제약을 넘어서서 기존의 조형질서를 흩뜨려 놓음으로써 동양 그림의 참 재미와 신명을 되살려 보고자 했다. 사실 그는 동이니 서니, 전통이니 현대니, 수묵이니 채색이니, 구상이니 추상이니 하는 너무 대위적이고 이원적으로 갈라놓고 사고하는 버릇이야말로 창작 본연의 자율을 폐쇄적으로 몰아가는 인습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황창배 무제 분채ㆍ먹 121x100㎝ 1987
황창배 무제 분채ㆍ먹 121x100㎝ 1987



황창배, 무제, 163×190㎝, 캔버스에 혼합재료, 1989
황창배, 무제, 163×190㎝, 캔버스에 혼합재료, 1989


 

황창배 화백의 그림세계 

그의 대표작인 <무제>(1987)는 화조화의 내용에 민화적 요소를 적절히 가미한 그림이다. 의인화된 식물, 바위나 의태화된 동물 모습 등이 뒤섞이고 필묵의 자율성 속에서 산수그림이 하나의 호흡과 흐름 속에 활기차게 전개된다. 먹과 채색이, 산수와 인간이 뒤섞이고 있다. 그림이 문자의 사변성과 조우하거나 논리의 차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의 신명과 재미 속에서 온갖 느낌과 삶의 양태를 축약하고 있다. 

“나는 내 그림을 통하여 어떤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겠다는 생각은 별도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림마다 그 당시의 즉흥적 감정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화면에 그려진 결과는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기하학적 형체 등이 곧 잘 등장하곤 하는데,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 그려졌느냐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나 나에게는 표현된 대상이 주는 의미의 진폭은 그리 크지 않다. 나는 표현된 그 구체적 대상들이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최종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노트) 

한지에 스며들고 퍼져나간 자취가 어느덧 이미지가 되고 그러다가 이내 번짐과 채색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 한다.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풀어놓고 화면에서 즉흥적으로 형태를 찾아내면서 탄탄한 구조로 화면을 조직하고 있다. 먹과 분채를 사용하여 자율적으로 번지게 하는 선염 기법으로 임의적으로 추상적인 면을 만들다가 순간적으로 그 면에 적당한 형상들을 찾아 그려나가는 방식인데 그것은 ‘객관적 대상과 주관적 신체가 만나는 순간의 충돌을 중계’하는 방식이고 이는 자유연상에 해당한다.

그의 회화에는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있다. 고전의 차용과 그것의 현대적 해석이 있고, 수묵이 있는가 하면 채색이 있고, 형상이 있으면서 동시에 형상의 부정이 있고 의도적인 개입과 그것을 지운 자취 또한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그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하고 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이미지를 기술하는 다분히 초현실주의에서 엿보이는 자동기술법에 유사하다.

이러한 화면구성의 특성은 이른바 ‘무위(無爲)’함이다. 황창배는 그의 그림에 지향점이나 의도적인 내용을 가능한 지우고자 했다. 그 결과 화면에는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공존하고 자연스럽고 유희적인 효과가 흘러넘친다. 그것은 정처 없이 화면을 순환하면서 모든 결정론적인 규정을 비껴간다. 우연적이고 느닷없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거나 돌고도는 이른바 순환론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한국적 음양관과 자연관에 기반해 순환의 원리 속에 생성시킨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일정한 방위가 없고 원근적 거리 개념 또한 상실되어 있다. 구체적인 형상은 부재하고 모든 것은 해체되고 다시 종합되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는 다분히 동양의 자연관을 떠올려준다. 나무가 꽃이 되고 사람이 되고 다시 새나 구름으로 그렇게 서로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순환하는 이 구성은 흥미롭다.

이러한 범신론적 세계관이나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시선이야말로 한국인이 지닌 세계관이고 생명관이다. 황창배는 바로 그러한 인식을 이미지화하려 했다.

황창배는 동양화의 현대성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여러 감동을 극대화시켜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기존 동양화를 가장 극단으로 해체하고 경계를 터 나갔다. 이후 그는 동양화를 더욱 확장시키고 해체시켜 아크릴릭, 유채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캔버스 작업, 문자와 이미지의 겸용, 부조 등도 구사하면서 그야말로 분방하고 자유로운 그림으로 힘껏 밀고 나갔다. 그러나 이는 그가 깊이 있게 터득해나간 전통, 그러니까 한학, 서예, 전각, 초상화, 민화 등을 완벽히 체득한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죽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새삼 ‘스페이스 창배’를 통해 여전히 그의 유작들을 살필 수 있고 이를 통해 그가 지닌 예지력과 탁월한 감각을 실감하고 있다.